수원시가 2026년 예산안에서 보호관찰 청소년 사회 정착 지원 사업 예산을 ‘유사·중복 사업’이라는 이유로 전액 삭감한 사실이 알려지며 지역 교육계와 시민사회는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정책은 논리와 근거를 가져야 하지만, 약한 존재를 버리지 않는 책임 또한 공공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입니다. 이번 결정은 그 책임을 저버린 조치이며, 반드시 재검토해야 합니다.법의 취지를 거스르는 후퇴올해 제정된 「수원시 보호관찰청소년 사회정착지원 조례」는 오랜 논의와 사회적 공감대 속에서 만들어진 결실입니다. 그 정신은 분명합니다.“벼랑 끝에
며칠 전 한 교원단체에서 수학여행 중 학생 사망 소식을 전하며 ‘현장 체험학습을 없앨 절호의 때’라며 독려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참담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학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빌미로 학교의 책임을 내려놓으려는 듯한 이 태도가, 과연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일 수 있겠습니까?현장 체험학습은 성장의 소중한 기회입니다.저는 지역 아동 돌봄터를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가장 큰 바람 가운데 하나는 제주도에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초등 1학년부터 중3까지 18명의 아이들과 2박
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경험했습니다. 영어 강사로 근무했으며, 세 곳의 기업에서 해외 영업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강남과 명동의 피부과·성형외과에서 해외 고객을 응대하는 마케터 및 코디네이터로도 일했습니다. 즉, 사무직과 서비스직을 모두 경험한 셈입니다.이 과정에서 제가 절실히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바로 대다수의 문과 직무는 굳이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영업·마케팅 업무의 본질은 해외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correspondence)과 내부 부서의 협조를 이
저는 지난 1년간 청담동의 한 영어학원에서 영유아와 초등학생을 가르쳤습니다. 이 글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왜 지금이야말로 ‘영어교육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인지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강남권 영유아·초등 영어교육의 특징대치동을 비롯한 강남 지역에서는 영유아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영어 Immersion(몰입식) 교육이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된 이후, 학부모들이 “영어 1등급을 초등 시절에 미리 확보하겠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고, 그 수요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영어학원들의 전략
“2년 차 교사입니다. 올해 들어 학생들에게 화가 많이 납니다”로 시작한 청중의 질문에 문 전 판사는 “탄핵 심판 기간에 화가 많이 났는데, 자주 들었던 노래가 있다. 김완선의 ‘이제 잊기로 해요’를 반복해서 들으면 화를 조금 잊을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화 나는 것은 어쩔수 없다. 화를 내는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는 그 자체가 좋은 교육자의 모습”이라 답했다.두 시간 남짓 이어진 강연 내내 청중들 사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진솔한 생활언어로 우리 교육의 화두를 말하고, 스스로 말했듯 보수의 언어로 진보를 말하면서 공감을 끌어내
[창 밖의 교육] 여름이 무섭다. 작년 여름도 무서웠다. 여름을 보내며, 벌써 내년 여름을 걱정한다. 외국 어디의 고산지대를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현실성은 없다. 치앙마이가 어떻고, 강원도 태백이 어쩌고 하지만, 허황된 소리다.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 얘기다.내가 사는 이곳을 여름 나기 좋은 동네로 만들면 된다. 다른 동네보다 평균 2℃만 낮다 해도,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잘만 하면 5℃ 차이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여름에 에어컨 앞에 붙어 사는 우리 청소년들 대책도 만들어 줘야 한다.동네 온도를 낮추려면, 관건은 물과
아침에 출근하여 피씨를 열어볼 시간이 되는 광주 전남의 교육계 인사들이 반드시 훑어본다는 호남교육신문. 열어보는 이유는 ‘아는 사람들’의 소식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명하지 않더라도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다.교육언론을 운영한지 내년이면 10년이 되는 호남교육신문 김두헌 편집인을 22일 만났다. 밑반찬과 요리가 구분되지 않는 전남 목포의 맛깔난 식당에서 얘기를 나누었다.교육언론이라는 흔하지 않은 공통분모 때문에 초면이 아닌 듯 이야기는 무성했다. 회사 수지는 어떻게 맞추는지, 기사가 만들어지는 절차, 광주 전남
내란 사태를 통해 1987년 체제의 한계는 극명히 드러났다. 1987년 체제가 만든 민주주의는 절차적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으며, 산업화 시대의 세계관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헌법 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이다. 도대체 왜 ‘능력에 따라’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일까? 능력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능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것은 생물적이고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사람이 어떤 사회경제적 배경 속에서 태어나는가에 따라 달
우리 국민은 마침내 내란 수괴를 파면했다. ‘내란 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동안 국민들은 불안에 시달렸다.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친위 쿠테타에 아연실색한 것은 우리 국민만은 아니었다. 국가 신인도는 땅에 떨어졌고, 그야말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였다.많은 사람들은 내란 세력이 시체를 담는 ‘영현백’ 수천 개를 주문했다는 언론보도를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환호하면서 ‘이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헌법이 개정되고 이어 일련의 법률들이 개정되었지만, 여전히 공무원들은 정치기본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 공무원 신분인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교사들의 정치기본권을 제한하는 법적 근거는 무엇일까?우선 대한민국 헌법을 보자. 헌법 7조에서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로, 그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에 따라 보호된다’라고 되어 있다. 다음 국가공무원법을 보자. 이 법의 65조에 정치운동의 금지에서는 공무원은 ‘정당, 정치단체 결성에 관여 또는 가입할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기대하였으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대공황 시기 유럽에서 파시스트들이 준동하고,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 이후 친일 잔재 세력들이 우익세력과 결합하여 백색테러를 자행했던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비합리적인 생각에 휘둘리는 것일까?능력주의와 경쟁교육이 파시스트를 길러낸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주의이다. 내가 보기에 교육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쉽게 놓치 못하는 통념이 있다. 그것은 교육은 국가가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네 학교에 교장이 새로 왔다. 여러 말들이 학교로부터 새어 나온다. 말들을 종합하면 그는 ‘하지 마’ 인간으로 보인다. 일찍 교장이 되어 남은 날이 길고, 그의 아이들이 아직 어려 임기를 ‘무탈하게’ 보내야 한다. ‘그러니 일 벌이지 마라’그간 잘 해왔던 마을교육 사업이 하나씩 사라진다.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하면서 겁도 난다. 마을과 학교가 의기투합해 만들어온 십 년 세월이다. 그간 해왔던 일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어렵게 쌓아온 사람 사이의 신뢰마저 흔들릴까 겁난다.교장이 뭔데, 생판 모르는 동네에 불쑥 와서는, 기껏 몇 년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성과 중 하나는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이었다. 광역 시·도는 물론이고 기초 시·군·구 의회가 부활되고, 자치단체장도 주민들이 선출하게 되었고, 2010년부터 교육감도 주민직선으로 선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의원들과 자치단체장과 교육감을 선출하게 되었으니 교육자치는 이루어진 것일까?안타깝게도 국민들의 다수는 민주주의를 곧 ‘대의제’로 사고한다. 그러다 보니 자치는 여전히 낯설다. 심지어 자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학벌 좋은 엘리트들에게 자신의 권리와 미래를 위탁하려 한다. 그 결과 가난한
얼마 전 야당 대표가 자신들의 당이 중도보수정당을 표방한다고 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육 불평등이 사회 불평등으로, 사회 불평등이 교육 불평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경쟁교육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일까?내가 보기에는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미 교육이 부자들에게는 부의 세습의 도구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의 대물림의 사슬이 되었음에도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과거처럼 교육을 통해 계층 상승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