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일방적 피해자라는 서사와 담론은 교권 확보에 도움 안 돼
개인의 소비 편리성이 노동자의 희생 위에 서지 않는 세상이어야

김현희 ‘교육하는 즐거움’ 대표
김현희 ‘교육하는 즐거움’ 대표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에 비해 큰 권력을 갖는다. 직위와 책임, 나이와 역할 기대에서 기인한 구조적 우위다. 나는 교사가 언제나 피해자라는 서사, 교사 피해자 담론이 달갑지 않다. 이와 같은 관점은 사회적 대화나 교권 확보에도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편, 교사와 학생·학부모의 권력 관계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실제로 학생이나 학부모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 교사의 자존감과 정체성, 인간의 존엄까지 바닥으로 내던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서이초 사태 이후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교사가 운과 개인기로 버틴다. 개념 없는 학부모, 무능력한 관리자가 결합하면 학교는 순식간에 민원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다. 학교에서 힘의 역학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복잡한 관계의 역학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전은 급식 문제로 시끄럽다. 교육청 앞은 학비노조와 학부모들이 서로 다른 현수막을 걸고 대치 중이다. “무기한 파업으로 직종 교섭 승리하자.” vs “노조라는 약자 프레임에 기대 어린 학생에게 갑질하는 것이 권리인가, 차라리 위탁급식.” 아마 시민사회나 진보 언론은 전교조와 같은 교원노조가 노동조합의 연대를 통해 교육청을 함께 압박해 주길 원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장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어찌 보면 가장 쉬운 선택지다.

하지만 나는 노동조합 전임 기간에 영양교사들의 사정, 급식실 관계 구조, 노조 교섭안의 디테일을 들여다보았다. 디테일을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다. 다만 교육청과 교장은 언제나 '갑'이자 '악'이고, 노조와 조리 종사자는 언제나 '을'이자 '절대 선'이란 식의 구도로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다.

최근 새벽 배송과 야간노동에 대한 논쟁이 거세다. 거칠게 요약하면 건강권과 생계유지권의 충돌이다. 한 용접 노동자이자 작가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슬픈 현실이지만, 쿠팡이 제공하는 일자리는 중소기업 평균보다 낫다"라는 말은 논쟁적인 발언이었다. ‘임금이 체납되지 않고 어지간한 육체노동보다 덜 위험하다’라는 이유였는데, 전통 진보 매체의 관점에서 환영받지 못할 소리다.

하지만 학교의 권력 구조, 급식 현실과 노동조합의 파업, 새벽 배송 문제 모두 단순하지 않다. 일방적인 피해자-가해자 구도, 노조는 선이고 사용자는 악이라는 도식, 혹은 그 반대의 도식은 누가 옳은지, 누구 편을 택할지 재빨리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될지언정, 실제 문제 해결에는 다가서지 못한다. 현실 문제의 해결은 서로의 경험과 조건을 있는 그대로 나누며, 논의의 장을 넓혀가려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초등학생들의 갈등 상황 해결도 쉽지 않다. 100:0으로 깔끔하게 가르마를 탈 수 있는 문제, 선악 구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교실에서 나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여러분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너의 말뜻은 알겠어, ○○가 잘한 건 아니야. 하지만 생각해 보자. 여러분은 작은 장난까지 선생님이 일일이 나서서 '누가 잘못 했네, 누가 사과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아니면 이 정도는 여러분끼리 해결하고 어깨 한번 툭 치고 다시 놀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그래, 네가 별 뜻 없이 한 말인 줄은 알겠어. 그래도 생각해 보자. 여러분은 나와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게이라고 놀리며 인간을 혐오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아니면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어?"

새벽 배송과 야간노동 논란을 바라보면서 같은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과로와 산재로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소비의 편리성이 노동자의 희생 위에 서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또 한편 '쿠팡의 노동조건이 중소기업 평균보다 낫다'라는 현장 노동자의 경험적 진술이 진영의 기준으로 매도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곡해가 아니라 선해가 기본값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 누가 옳고, 누가 더 정의로운지 경쟁하며 악다구니만 쓰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의견을 통해 논의의 장이 넓어지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교육노동자인 내가 학교 현실에 대해 말하건, 노동운동에 대해 말하건, 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개량주의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는 세상. 개량주의자가 아니라 해결주의자들,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품은 현실주의자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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